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와세 히토키 (문단 편집) === 2008 베이징 올림픽 이후 ===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처참한 퍼포먼스의 영향이었는지 주니치 구단에 항의전화가 엄청나게 걸리기도 했으며, 경기장에선 야유도 받았으며, 심지어 악질 팬들의 협박 편지까지 받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을 정도였는데 그 영향인지 2008년에는 시즌 [[평균자책점]]이 2.94까지 오르면서 결국 통산 평균자책점이 다시 2점대가 되는 부진을 겪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리그 후반전에 [[이승엽]]과 재대결한 적이 있는데,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1루가 찬 상황임에도 [[고의사구]]를 지시해서''' 고의사구로 승부를 피한 애처로운 에피소드도 있었다. 해설자들은 이와세의 트라우마를 염려한 감독의 배려라고 애써 변호하였으나 진실은 당사자들만 알 일이다(…) 그래도 올림픽 때 불을 지른 걸 빼면 10년 연속 50경기 등판을 달성하기도 했고 포스트시즌에서 무실점 기록을 이어가기도 하는 등 완전히 나쁘진 않았던 시즌을 보냈다. 시즌 종료 후엔 직전에 올림픽에서 난타당한 경험이나 구단에 대한 애착 등 여러 가지 영향으로 인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하고 연봉 4억 3,000만 엔으로 계약하였다. 그후 2009년엔 2승 3패 1홀드 '''41세이브''' 평균자책점 2.12를 기록하여 2년 만의 구원왕 수상으로 다시 주니치를 대표하는 수호신의 위엄을 되찾았다. 2009년까지 기준으로 11년 동안 '''1점대''' 평균자책점만 6번 기록하고, 3점대를 기록한 시즌도 단 1번(2001년, 3.30)일 만큼 안정된 활약을 펼치면서 일본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여기에 데뷔 시즌부터 '''15시즌 연속 50경기 이상 등판''' 기록을 이어 왔으며 후술하다시피 끝내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초로 '''1000시합 등판'''까지 달성환 철완이다. 2010년 이후에는 슬슬 노쇠화가 눈에 보여[* 물론 수준급의 실력이었다.] 주니치에서 후임 마무리를 열심히 키웠...지만, 2014년까지도 주니치의 주전 마무리는 여전히 이와세였다. 이후 2010년 시즌도 세이브를 차곡차곡 쌓으면서 구원왕을 차지하긴 했는데, 예년보다 [[블론세이브]]도 은근 많았고 [[평균자책점]]도 [[임창용]]에 비해 높은 편인 데다가 임창용의 소속팀인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이와세의 소속팀인 [[주니치 드래곤즈]]의 전력 차이를 생각하면 결국 세이브 숫자를 제외하고는 임창용에게 밀렸다는 평가가 일본 내에서도 정설. 성적만 놓고 보면 2008, 2010 시즌이 그의 흑역사에 가깝게 된 셈이다. 이 시기부터 슬슬 노쇠화가 나타나면서 주니치에서 후임 [[마무리 투수]]를 찾을 시도도 해봤지만, 노쇠화가 왔다고 해도 아직 이와세 본인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던 데다 주축 셋업맨인 [[아사오 타쿠야]]를 제외하면 마땅한 후보가 없었던 탓에 2014년까지 계속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되었다. [[2011년]]엔 [[6월 16일]] 대 [[소뱅 호크스|소프트뱅크]] 원정경기에서 [[타카츠 신고]]를 제치고 일본 통산 [[세이브(야구)|세이브]] 1위에 등극했으며, 9월 4일에는 일본 통산 300세이브를 달성하였다. 2013년 4월 18일 야쿠르트와 치른 경기에서는 일본 통산 350세이브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하였다. 이렇게 이와세가 기록의 사나이가 된 탓에 이와세가 은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아사오 타쿠야]]는 영원히 마무리로 가는 길이 막힌 채 특급 셋업맨으로 남아있을 기세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2014년 7월 27일 요미우리전에서 일본 통산 400세이브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이해에는 아래에서도 보이듯 정말 오래간만에 3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등판 경기 수도 30경기대로 줄어들었다. 결국 후반기에는 마무리 자리를 영건 [[후쿠타니 고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2015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단 한 차례도 등판하지 못했다. 이로 말미암아 기존의 2억 5000만엔에서 80%가 삭감된 5000만엔의 연봉을 받게 되었다. 2015 시즌 후 [[일본프로야구]] 현역 선수 중 [[미우라 다이스케]]의 뒤를 있는 최고령 선수 2위가 되었다. 시즌 시작 시점에서 이와세의 나이 순위는 '''11위'''였으나 미우라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시즌 종료 후 은퇴선언을 하였고, 주니치 팀 내 최고령자이자 무려 50세까지 뛰었던 [[야마모토 마사]]까지 은퇴하면서 이와세가 드디어 ~~노인정~~주니치 팀 내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나이 40이 넘도록 아직 팀 내에 [[야마모토 마사|선배]][[타니시게 모토노부|들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주니치가 얼마나 세대교체가 더뎠는지를 대변한다. 2016년 전반기 종료 시점에서 1군에 등록된 선수 중에서는 최고령 선수였다.[* 심지어 같은 [[센트럴리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인 [[타카하시 요시노부]]보다도 한 살이 더 많았다.] 아직 [[미우라 다이스케]]가 1군에 등판하지 못했기 때문. 하지만 5경기에서 평균자책점 12.00을 기록하는 부진을 겪으며 2군에 내려갔다. 그리고 미우라가 시즌 종료 후 은퇴하며 [[일본프로야구]] 현역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프로 19년차이자 만 42세의 현역 최고령 선수로써 맞이한 2017년에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했다. 마무리 자리는 [[후쿠타니 코지]]를 거쳐 사이드암 투수인 [[타지마 신지]]에게 넘겨준 지 오래였지만 주로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로서 활동하며 간만에 50경기 등판을 넘길 페이스를 보여줬고 6월 23일 요미우리전에서 9회 1:0으로 앞선 2사 1,2루 상황에서 등판, 대타 카메이 요시유키를 2루수 땅볼로 잡아내어 세이브를 기록, 통산 세이브 기록을 403으로 늘렸다. 다만 방어율이 4점대까지 치솟는 등 그다지 안정적인 계투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2017년 8월 6일엔 [[요네다 테츠야]]를 제치고 일본 신기록인 '''역대 최초 95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이 경기는 요미우리의 주루실수(...)[* 호수비로 외야플라이가 잡히면서 안타일 줄 알고 뛰었던 1루주자가 2루를 밟고 지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다시 1루로 돌아가며 2루를 밟지 않았다....--[[채태인|???]] : 반갑다 친구야-- 이 실책의 주인공은 외야수 시게노부 신노스케.]로 인해 이와세가 [[아베 신노스케]][* 이와세보다 이 상황을 먼저 눈치챘다.]를 상대하지 않고 견제구만 2번 던져서 아주 쉽게 경기를 끝냈고 자신의 통산 404번째 세이브도 기록하게 되었다. [[https://youtu.be/Z5b1He8ew2I]] 시즌 종료 시점에서 954경기 등판, 57승 51패 404세이브를 기록하였으며, [[컴백상]] 수상과 더불어 연봉도 2500만엔 증가한 7500만엔에 계약을 갱신했다. 2018 시즌부터 투수코치 직을 겸임할 예정이다. 시즌 뒤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코치직에 전념할 것으로 보이면서 서서히 본인의 커리어를 마무리해가는가 했는데, 뜬금없이 시즌 오프 때 도쿄스포츠[* 일본의 대표적인 찌라시 잡지로, 줄여서 도스포,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東スポWeb 이라고만 나오기 때문에 일본 사정을 잘 모르는 한국의 기레기들이 보통 '동스포'니 '히가시 스포츠'니 하는 식으로 오독을 하는 매체이다. 참고로 이 매체의 위상을 알기쉽게 비유하자면 NPB의 [[더 선]]이라고 보면 된다. 즉 산 더미 같은 '아님 말고'식 기사 속에 어쩌다 한줌 진실이 숨어있는 격.]에서 [[닛폰햄 파이터즈|닛폰햄]]에서 FA로 데려온 포수 오노 쇼타의 '''보상선수로 지정될 뻔했다는''' 충격적인 카더라가 보도되었다. 해당 보도에 따르면, 구단에서 "선수 겸 코치까지 하는 팀 레전드고 이제 은퇴도 얼마 안 남았는데 설마 데려가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이와세를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했는데 닛폰햄이 ~~드래프트에서 [[마이웨이]]를 걷는 또라이 구단답게~~ 진짜로 이와세를 보상선수로 선택했고, 규정에 따라 보상선수로 이적해야 한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이와세는 "이제 와서 팀을 떠날 바에야 은퇴를 하겠다"며 강경하게 이적을 거부했다고 한다.[* 규정상 보상선수로 지정된 선수가 이적을 거부할 시엔 해당 선수는 실격선수로 지정되어 사실상 [[임의탈퇴]] 처리가 되며 이전 소속구단을 포함한 어느 팀에서도 뛸 수 없다.] 그제야 발등에 불 떨어진 주니치는 다급히 닛폰햄에게 이와세의 의중을 전달하며 제발 보상선수 지정을 철회해 달라고 필사적으로 빌었고, 결국 규정상 보상선수 미선택 시에 받는 양도금에 웃돈을 더 얹어주는 조건으로 이적을 무마시켰다고 한다. 이 보도가 처음 나왔을 땐 도쿄스포츠가 워낙 불확실한 [[찌라시]] 보도로 악명높은 데다 정보제공자에 대한 정보도 불확실한지라 다들 도쿄스포츠가 늘 그렇듯이 ~~[[어그로]]를 끄는~~ 말도 안되는 찌라시 기사를 냈다고 생각해서 반향이 미미했으나, 이후 산케이 스포츠[* 이 매체는 스포츠 쪽으로는 카더라 기사가 없다시피하다.] 등 다른 매체들도 도쿄스포츠와 동일한 내용의 보도를 하면서 이 [[카더라]]가 한때는 기정사실화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닛폰햄이 주니치로부터 보상선수 명단을 받았을 때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흥미있는 명단이다."라는 반응을 보였었고[* 당시 양팀 팬들의 반응은 노인정 구단에서 자리 못잡고 백업 역할만 하다가 어느덧 30줄에 접어들어 남 주긴 아깝고 데리고 있자니 애매해진 1군 벤치급 노망주들이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예측했었다.] 바로 보상선수를 지명할 것처럼 해놓고서는 해를 한참 넘긴 후에 고작 금전으로 보상을 받겠다는 발표에 다들 의아해하는 반응이었는데, 그 흥미있는 명단의 정체가 이와세였고 주니치 구단이 물밑에서 자신들의 삽질을 덮느라고 동분서주하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는 얘기. 만약 사실이라면 [[주니치 드래곤즈]] 한 팀에서만 20여년을 뛰며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을 쌓아온 레전드가 평생을 몸바쳐온 구단에 말년에 뒤통수를 맞고 애먼 구단에 가서 커리어를 마감하거나 강제은퇴를 할 뻔한 사태로, 전체 선수단에게 미칠 부정적인 파급효과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인 대형 사건이며 현재의 주니치가 얼마나 답이 없는 구단인지 증명하는 해프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상술했듯이 워낙 불확실한 [[찌라시]] 보도를 자주 내는 도쿄스포츠 출처라는 점도 그렇고, 타 매체의 후속 보도들 역시 도쿄스포츠의 기사를 그대로 썼던 것에 가깝기 때문에 이 해프닝이 진짜로 있었다고 확언하기는 어렵다. ~~[[광주 페퍼저축은행 AI 페퍼스|페퍼 씨,]] [[이고은(배구선수)|어디 가려운 데 없수?]]~~[* 공교롭게도 2023년 한국에서 비슷한 사례가 나왔다. [[김강민]]이 [[한화 이글스]]로 [[KBO 리그 2차 드래프트|2차 드래프트]]로 이적한 것.] 어찌되었건 주니치에 남아 2018시즌을 맞이하게 된 이와세는 나이는 못 속이는지 시범경기에서 3구 연속 피홈런을 허용하는등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나, 개막 이후 주니치의 답 없는 투수진 때문에 계녹 1군에서 모습을 보이게 되었고 5월 2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야쿠르트]]와의 [[메이지진구 야구장]] 원정경기에서 통산 405번째 세이브를 기록했다. 5월 24일 기준 평균자책점 2.25, WHIP 0.83으로 시범경기때의 부진을 털어내며 만 44세의 고령에도 주니치 불펜의 한 축으로 활약하고 있었으나.. 6월부터 갑자기 후임 마무리 타지마와 더불어 다량실점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며 평균자책점이 5점대까지 치솟아버렸다. 2018년 9월 16일 통산 998번째 등판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와의 [[도쿄돔]] 원정경기에서 7회 2아웃 만루 때 [[원 포인트 릴리프]]로 등판하여 [[아베 신노스케]]에게 생애 첫 [[만루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날 주니치는 11:3으로 대패하며 6년 연속 루징 시즌이라는 치욕적인 구단 신기록을 경신하고 말았다. ~~은퇴시즌인데 답 없는 팀 때문에 개고생..~~ 9월 26일 팀 동료 [[아라키 마사히로]], [[아사오 타쿠야]]와 더불어 시즌 종료 후 은퇴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드디어 길고도 길었던 선수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9월 28일 '''NPB 통산 1000경기 등판'''을 달성했다! 2019년에 은퇴경기를 위해 임시로 육성선수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3월 2일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시범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1번 타자 [[이노우에 세이야]]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20년 간 일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칭해진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었다. 은퇴 후에는 [[CBC]]와 [[주니치 신문|주니치스포츠]]의 해설자로 활동 중에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